‘굳 바이’ 하며 그 분과 헤어지는데 뒤를 돌아보니 그의 몸 전체가 흔들린다. 필시 울고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럴 때는 모른 척 하는 것이 그를 위하는 길이다.

금년 77세.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한국서부터 우리 가족과 아주 친하던 분이다. 우리보다 일 년 쯤 늦게 미국으로 이민가서 힘든 공부를 마치고 대학교 교수로 당당히 직장을 잡아 지금까지 일 하고 있는 성실한 분이다. 아들 셋 중 둘을 M.D 와 Dentist로 만들만큼 자식에 대한 교육열도 대단하다.

세상 눈으로보면 성공한 케이스라고 하겠지만 그의 가슴은 그리 따스하지만은 않은 듯 싶다.
공부에 별로 취미가 없는 한 아들은 아버지의 공부 닥달에 못 이겨 ‘다시는 당신을 보고싶지 않다.’ 는 글을 남기고 영원히 집을 나가 버렸다.

가진 것 없이 처음 이민 와서 당신 공부를 뒷바라지 하던 간호원 아내는 오버타임의 매력을 뿌리치지 못해 쉬는 날 하루도 없이 일하다 일찍 세상을 떴다. 자기 병원에 일이 없는 이틀은 옆의 주에 까지 운전해 가며 일하다 몸을 망가뜨려 마흔도 안 된 나이에 안타깝게도 가족 곁을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

아내와 사별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에 광고까지 내며 선보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헌 여자 보다 새 여자를 좋아하는데 그 교수도 마찬가지여서 처녀장가를 들었다. 아이 셋 있는 홀아비가 처녀장가 갈 때는 신이 났었겠지만 결혼 경험없는 여자가 아이 셋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새 아내와 기대했던 ‘베게 송사’도 꽝이었고 사회경험, 결혼경험 없는 사람한테 큰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남편의 공부를 위해 밤낮 없이 일하던 조강지처를 생각하면 가슴이 매인다고 뒤 늦게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노교수. 첫 번째 아내와의 사별 후 아무런 기쁨이나 행복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이 나이까지 왔노라며 인생이 슬프다고 하소연한다.

그의 첫 아내는 간호원이었지만 자기 건강을 지키지 못해 일찍 세상을 떠나 인생의 실패자가 되었고 또한 교수가 되는 것에 최대의 목표를 두고 살아온 그 교수도 인생 잘 살아왔다고 말할 수 없다.

조촐한 집에 적당한 직장. 오손도손 아이들과 마주앉아 도란거리는 얘기가 있는 평범한 가정이 가장 복된 가정인 것을 그 교수는 알까? 막 노동으로 험하게 된 거칠은 아버지의 손등을 바라보는 자식들의 애잔함과 가족으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성공한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노구를 끌고 공항을 빠져 나가는 그 노교수의 눈물을 보고 온 날 내 가슴에도 먹먹한 구름 한 줄 회오리처럼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