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 작가/정원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터>, <연어 낚시 통신> 저자 빅토리아문학회 회원

그날 당신께 어떤 수프를 끓여서 내놓았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모짜렐라 치즈를 살짝 올린 프렌치 어니언 수프였던 것 같기는 하지만
샐러리 릭 토마토 당근 숭덩숭덩 썰어 넣은 채소 수프였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부드러운 크림 수프나 짭조름한 클램 차우더였을 겁니다
아무튼 당신은 접시를 깨끗이 비워내신 뒤 참 맛있다 하셨습니다

오늘 당신을 생각하며 오랜만에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끓였습니다
자그마한 양파가 어찌나 야무지게 버티는지 칼을 잘 받질 않았습니다
억지로 세 개를 자르고 나자 기어이 눈물이 나고 말았습니다
단단해서 더 매웠는지 눈물샘이 쉬지 않고 두레박질을 해댔습니다
양파를 만진 손으론 훔쳐낼 엄두가 나질 않아 내버려 뒀습니다
볼을 타고 내려와 마룻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렸습니다
그 눈물 너머로 백내장처럼 뿌연 봄볕이 날아들었습니다
감았던 눈을 뜨니 은 연어 비늘처럼 반짝이며 퍼져갔습니다
늘 가까이 있던 그 빛을 보았을 뿐인데 생각이 멈추고 시간이 서버렸습니다
그리고 진공관처럼 멍해진 머릿속에 홀로그램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놀리며 수프를 맛있게 드시는 환한 얼굴
그러다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설핏 웃는 바로 당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따사로운 봄볕은 올 해에도 어김없이 크로커스와 함께 왔습니다
맨몸뚱이로 피어난 이 작은 꽃을 따라 봄은 그렇게 소리 없이 왔습니다
혹시 그거 아세요? 크로커스는,
언 땅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열을 내 녹여낸다는 것을
그 꿋꿋한 몸짓으로 봉긋한 꽃망울과 굳센 이파리들을 키워낸다는 것을

당신도 크로커스처럼
당신도 크로커스처럼

내년 봄에도 당신을 위해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끓이겠습니다
양파가 아무리 매워도 울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당신 앞에 따뜻한 수프 한 그릇과 마늘 바게트 몇 조각 함께 내놓을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