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16, 2016

 글 쓰는 사람이 상을 받으면 명성이 뒤따라 온다.

한강이라는 이름의 여류 작가가 쓴 ‘채식주의자’ 가 2016 맨부커 인터내셔날 상을 받는다. 외국에서 주는 상을 받은 한국인 작가가 드문 상태에서 그녀는 물론 우리나라 문단에 큰 영광이다. 그런데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이런저런 평이 교차하는 것을 보고 도대체 어떤 작품인가 싶어 읽는다

어느 날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 덩어리들을 헤치고 지나가며 온몸에 피를 묻힌 꿈을 꾼 이후로 냉장고에 있던 고기들을 내다 버리고 채식주의자가 된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1부 ‘채식주의자’.
도입부부터 독자의 눈을 붙잡아 놓는 이야기 전개 방식과 깔끔한 문체를 보면서 작가를 소개하는 출판사의 평대로 구성이 탄탄하겠구나 하는 기대를 한다. 그것은 초반부터 지루한 전개로 쉽게 책에서 흥미를 잃어가게 만드는 많은 작품을 보아왔던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다. 그런데 가슴을 들어 낸 채 목을 눌러 죽인 새를 물어 뜯어 입술에 피를 묻힌 모습으로 그녀를 미친 여자로 만들어 놓은 마무리 장면을 보며 이건 뭐지?하는 의문이 든다.
우선 주인공은 꿈을 꾼 이후 생긴 고기 혐오 증상과 더불어 미쳐가는 사람일 뿐 채식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채식주의자는 아닌데 작가는 제목을 왜 ‘채식주의자’로 했을까?

여러 번 반복해 꾼 꿈 내용으로 보아 고기 혐오 증상은 자연스럽다. 고기를 안 먹는다는 설정 만으론 그녀가 비쩍 마르는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매일 2시간 정도 밖에 잠을 못 자는 것으로 한 것은 그럴 듯하다. 그런데 왜 그녀는 옷을 벗어야 했을까. ‘더워서’ 라는 이유는 뭔가 부족하다. 미친 여자니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또는 평소에도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으니 미친 상태에는 자연스레 나타나는 현상이다. 젖가슴으로는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아니면 미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억압된 무의식의 해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소통을 원해서?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설정은 작가의 몫이다.

자신이 꿈꿔 왔던 깊고 매혹적인 이미지를 찾아 나섰던 예술가가 나이 들어서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는 자신의 처제를 통해 실현하는 과정을 담은 2부 몽고반점.
어느 날 몽고반점이 퍼렇게 찍혀 있는 자신의 아기를 씻기다 알게 된 처제의 몽고반점에서 성적 환타지를 경험하고 그 성적 환타지를 자신의 예술적 완성으로 연결 시키려는 음모? 시도를 한다. 제 정신을 가진 여자를 성적 환타지에 끌어 들일 수는 없다. 더구나 처제다. 그러니 여자가 미쳐 있어야 가능하겠다. 벌거벗은 온 몸에 꽃을 그리고 그것을 샅샅이 영상에 담는다. 그러나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몽고반점은 그가 찾으려 했던 이미지에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진 않다. 동료 예술가이자 후배인 남자의 몸에도 꽃을 그린다. 얼크러진 남녀의 몸을 영상에 담는다. 나아가 실제적 교접을 요구한다. 여자는 미쳤기에 상관없다. 남자가 이 상황에서 거부한다. 자신이 예술을 하는 사람이지만 포르노 같은 행위를 예술로 인정하기에는 뭔가 꺼름직하다.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같은 예술을 하는 여자 후배를 불러 지금까지의 영상을 보여주고 자신의 몸에 꽃을 그리게 한다.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여자 후배가 이걸 발표할 수 있겠냐고 의문을 표시하지만 그는 늦은 밤 처제를 찾아가 Sex를 하며 그 장면을 촬영한다. 온 몸에 화려하게 꽃 그림이 그려진 남녀의 Sex 장면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논하기 전에 2부 몽고반점은 그 자체로서 상당히 자극적이다.

요즈음 많이 팔리는 책이나 영화를 보면 어김없이 적나라한 장면이 길게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슴을 들어 내 놓기 잘하는 미친 여자. 근친상간. 아마도 작가는 이 2부를 쓰면서 이 연작소설의 성공을 자신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부와 2부를 관통하는 주제의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3부 ‘나무 불꽃’ 으로 가서도 마찬가지다. 한 곳으로 모이지 않는 이런 저런 생각, 독백, 정신병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 어떻게든 많은 것을 펼쳐 놓으면 그 중 하나는 건져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있는 그대로 발밑에서 뿌리가 내리지 않고 물구나무 선 팔에서 뿌리가 내려 나무가 되려는 주인공.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세상의 나무들은 다 형제 같아., 시간은 흐른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어쩌면 꿈인지 몰라., 뭔가 의미심장할 것 같은데 주제의 공통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작가는 연결되는 내용도 없고 결론도 없는 3부를 길게 쓴다.

아무리 보아도 1부는 그저 2부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작품의 주제일 것 같았던 많은 분량의 고기 혐오 증상은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길을 잃고 버려진다. 무언가 깊은 내적 의미가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갖게 만든 1부가 자극적인 내용의 2부를 위한 합리적 설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한다. 처제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꿈꿨던 이미지 완성을 위해 동원 할 수 있었던 상대는 많다. 마치 도깨비 방망이 두들기면 나오듯 등장한다. 더구나 그들은 전위예술을 이해하는 전문 예술가들이다. 그래도 작가로서는 자신의 상대가 근친이어야만 했다. 왜? 때가 묻지 않은 신선한 날 것이라서?

작가는 그 의문에 대해 3부를 길게 쓰는 것으로 답했다. 많은 것을 쓰다 보니 작가의 속내도 들키게 된다. 인생관, 가치관, 윤리관,국가관, 세계관 그런 것들이 작품 속에 녹아 있다.
아직 정신도 성치 않은 애를…건드린 일은 인권이라는 기본적 권리를 떠나 수개월의 소송과 지루한 구명 운동 끝에 유치장에서 풀려날 수 있는 사건이다? 물론 작품성을 논하는 잣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책 뒤에 평을 쓴 사람은 그걸 사랑이라고 확정한다. 그럴까? 작가는 그래도 자신의 정체는 밝힌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열정은 수난’ 이라는 오리무중의 도피처를 만들어 놓고 그 안으로 숨어 버린다. 독자는 이 굴인지 저 굴인지 알 수 없는 그의 행적에 그만 돌아 나온다.

책이 많이 팔리기를 바라는 출판사는 이 책을 이렇게 평한다.
‘탄탄하고 정교하며 충격적인 작품으로 독자들의 마음에 그리고 아마도 그들의 꿈에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
그렇다. 작가가 남겨 놓은 충격적인 장면은 독자들의 마음에 그리고 내 꿈에도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